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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온 글257

작은 이름 하나라도-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담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2024. 8. 12.
여름꽃-이문재 그대와 마주 서기는 그대 눈동자 바로 보기는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어서  저기 뜨락에 핀 꽃 여름꽃을 보고 있다 어둠의 끝에서 몸을 활짝 열었던 아침꽃들 정오가 오기 전에 꽃잎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돌아가 있다 해를 바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려워서 여름꽃은 꽃잎을 모아 합장한다 여름꽃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 해의 눈동자가 된다 2024. 7. 24.
사랑의 발명-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2024. 7. 17.
가는 길-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2024. 7. 11.
노을을 적다-천양희 노을이 저 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 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 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저것뿐이다 저런! 2024. 7. 6.
겪어봐야 알게 되는 것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걸 목마름에 지쳐보면 안다. 물이 생명인 걸 일이 없어 놀아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 걸 아파보면 안다. 건강이 엄청 큰 재산인 걸 이별하면 안다. 그이가 천사인 걸 지나 보면 안다. 고통이 추억인 걸 불행해지면 안다. 아주 적은 게 행복인 걸 죽음이 닥치면 안다. 내가 세상의 주인인 걸  출처: MBN '동치미' 2024. 6. 24.
멀고 먼 길-김초혜 오 하느님 나이는 먹었어도 늙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햇살은 발끝에 기울었는데 내 몸이나 구하자 하고 굽은 마음 어쩌지 못해 얼굴을 숨기기도 합니다  몸 안에 가득 들여놓은 꽃은 붉은 조화 나부랭이였습니다  어찌 고요를 보았다 하겠습니까 2024. 6. 22.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허연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수다스러워진 너.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서로 들고 왔던 기억.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그것이 저주였음을.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당신. 가지.. 2024. 6. 20.
꽃으로 지고 싶어라-양광모 바람 한 점에 꽃잎 수십 점  꽃잎 한 점에 시름 수십 점 흩어지네  꽃으로 피어나지 못했어도 꽃으로 지고 싶은 봄날에는  왜 사냐 건 웃지요 왜 웃냐 건 또 웃지요 2024. 6. 13.
6월의 달력-목필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걸 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2024. 6. 7.
혼자서-나태주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보다 두 셋이서 피어 있는 꽃이 도란도란 더 의초로울 때 있다  두 셋이서 피어 있는 꽃보다 오직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이 더 당당하고 아름다울 때 있다  너 오늘 혼자 외롭게  꽃으로 서 있음을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라. 2024. 5. 27.
지혜로운 사람의 삶 비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을 깊이 생각하여 옳다고 생각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좋을 때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여기고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다. - 잡보장경(雜寶藏經) - 2024. 4. 14.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深深山川)에 붙는 불은 가신 임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金素月- 2024. 4. 10.
비움의 미학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을 채워갈 때가 아니라 비워갈 때이다. 사람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건 다 비워 놓고 채우지 않을 때이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나 다 비워 놓고도 마음이 평화로울 때이다. -나승빈- 2024. 3. 10.
無言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혀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을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 보게나. - 박재삼 - 2024.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