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끄적이는 글

몸이 기억하는 것들

by 캘리 나그네 2026. 1. 31.

 

오래전 TV에서 긴 세월을 무명으로 지낸 배우가 친한 가수와 함께 장(場)을 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바구니에 물건을 마구 담는 배우에게 가수가 "이제 유명해져서 돈도 잘 버는데, 왜 그렇게 음식을 쓸어 담느냐"라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배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배고프게 살다 보니, 몸이 가난을 기억해서 그래." 

 

골목길을 걷다 풍겨오는 김치찌개 냄새, 생선 굽는 냄새에 발걸음을 늦춘 적이 있다. 우연히 들려오는 익숙한 선율에 코끝이 찡해진 적도 있다. 이는 뇌(腦)가 상황을 분석하기 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감각(感覺)의 기억'이다. 기억이란 과거의 경험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몸은 머리보다 더 뚜렷하게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이성적인 판단보다 본능적으로 몸의 움직임이 앞섰던 순간이 있었다. 몸 어딘가에 숨어 있던 감정(感情)들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를 단순히 '기억(記憶)'이라 부르기엔 부족하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어느 순간과 몸이 다시 마주하는 '감각의 재회(再會)'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몸이 과거(過去)의 감정(感情)을 불러오면 이성(理性)의 머리는 바빠진다. 몸이 가져다준 파편화(破片化) 된 지난 감각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몸의 반응(反應)은 억지로 불러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특정한 무언가를 향해있는 감각이라는 열쇠가 꽂힐 때만 그 문(門)이 열린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몸이 기억하는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 날것 그대로의 감정에 언어라는 옷을 입혀 '추억'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머리는 기억을 정리할 뿐, 다시 그 시절로 데려가는 것은 몸의 반응이다. 바람에 묻어오는 비누의 잔향(殘香) 같은 사소한 것에도 옛날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2026년 1월 29일 산책길에서

'끄적이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가장 숭고한 희생  (0) 2026.01.27
새벽이 건네는 말  (0) 2026.01.23
홀로 있음의 풍요  (0) 2026.01.18
영원이란 이름으로  (0) 2026.01.16
행복은 가까이 있다  (0) 2026.01.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