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12월 말,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광주(光州)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청소년기와 20대 시절, 아버지 말씀을 거역(拒逆)했던 것이 어찌나 후회스럽고 죄송했던지.. 2주 후 귀갓길 김포공항 서점에서 구입한 '아버지'를 어두운 비행기 안에서 읽으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1996년 출간된 '김정현' 장편소설 '아버지'는 IMF 외환위기를 앞두고 가장(家長)의 권위가 흔들리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가족에게 소외된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조명하며 사회적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1997년, 배우 '박근형', '장미희'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공무원인 주인공 '한정수'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가족을 위해 밖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돈을 벌어오지만 정작 집에서는 돈 벌어다 주는 기계 취급을 받으며 소외된다. 죽음을 앞두고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요정 여종업원 '소령'을 만나 잠시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말기 암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가족의 앞날을 준비한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속내를 알지 못했던 자식들과의 단절, 아내와 소통의 부재, 뒤늦은 후회는 결국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해서야 용서와 화해를 하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 '김정현' 작가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 세대는 아버지의 앞모습(권위, 엄격함)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소설 속 아버지는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아픔을 숨기며, 억지로 웃음 짓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 아버지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영웅이 아니다. 가족의 안락(安樂)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건강을 담보 잡혔던 대한민국의 모든 아버지다.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눈물샘은 터진다.
1996년 이 책을 읽었을 때와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을 때의 감정이 다르다. 그때는 자식의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두 아들의 아비로, 인생의 무게를 아는 나이가 되어 주인공의 고독에 공감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울 장소가 없어서 울지 못하는 것뿐이다'라는 말처럼,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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