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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이는 글

봄날의 개꿈

by 캘리 나그네 2023. 3. 22.

권불십년 (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집에서 마눌님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한국 여자다. 나는 자기를 모르지만 본인은 나를 잘 알고 있다면서 대뜸 내일 오후 6시쯤에 시간이 되느냐고 묻는다. 있는 것은 시간뿐이어서 마눌님의 눈치를 살피며 '괜찮습니다'라고 하니 장소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는다. 마눌님이 누구야? 하고 묻길래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얼버무린다.

 

이튿날 오후,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몸에는 향수도 뿌리고 약속한 별다방(starbucks)에 도착하니 앉아있던 여인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군(軍)에 입대(入隊)하기 전 술에 취해서 약속을 까먹고 헤어졌던 여자와 많이 닮았다. 겉모습은 부(富) 티가 충만(充滿)하고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주름살이 없는 세련미(洗練味) 넘치는 여인이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자기소개를 한다. 오래전 어떤 모임에서 나를 본 이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대화 한번 못해보고 애만 태우다 세월이 흘렀다고... 외동딸을 데리고 미국에 와서 기반을 잡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지금은 딸도 결혼해서 타주(他州)에 살고, 헤어졌던 남편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났고, 한국에 있던 부모님 재산도 정리해서 혼자 살고 있단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얘기하자고 한국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술잔을 권했다. 아름답고 교양 있는 여인과 잔을 부딪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그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밤이 깊어가자 근처에 있는 호텔방을 예약했으니 같이 가서 맥주나 한 잔 더하고 가시란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얼굴을 보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면서...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내게도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호텔 룸으로 가서 맥주를 마시다 그녀가 샤워를 하겠다며 옷을 벗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찌나 몸매가 멋지고 아름다운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샤워를 마친 그녀가 오늘밤 같이 있어주면 안 되겠냐고 애원(哀願)을 한다. 나는 그렇게 잘 모르는 여인과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여자가 봉투 한 개를 건넨다. 3백만 달러 수표(check)가 들어 있단다. 오잉? 내게도 이런 횡재(橫財)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는 순간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쿵~ 소리와 함께 거실 바닥에 나뒹군다. "무슨 낮잠을 험하게 자? 뭔 꿈을 꿨길래 소파에서 떨어지고 난리야?" 마눌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젠장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봄날의 개꿈이다.

 

※페이스북에 있던 글을 각색(脚色: 흥미를 위해 없었던 것을 더 보탬)한 것임. 

권불십년 (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 (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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