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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이는 글

블랙아웃(Black out)

by 캘리 나그네 2021. 6. 1.

지나친 음주(飮酒)로 인해 생기는 단기(短期) 기억상실(記憶喪失)을 블랙아웃(Black out)이라고 한다. 짧은 시간에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도록 많은 양의 술을 마신 사람들에게 생기는 현상(現狀)으로 자신이 했던 행동(行動)을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표현으론 '필름이 끊겼다'라고 말한다.

 

1970년대 중반, 속된 말로 곤죽이 되도록 술을 퍼마신 후 블랙아웃(Black out=필름이 끊김)이 되어 목숨을 잃을뻔했던 적이 있다. 군입대(軍入隊)를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입대하기 이십여 일 전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귀향(歸鄕)했던 나는 입대하는 전날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고향 친구들과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퍼마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7월 초에 논산 훈련소 입소를 했으니 입대를 며칠 남겨놓지 않은 6월 말로 기억한다. 그날은 면소재지(面所在地)에 5일 장이 서는 날이었다. 우린 아침부터 장터에서 살고 있는 친구 집에 모여 전날 마셨던 숙취해소(宿醉解消)를 위해 해장술을 한다며 김치와 풋고추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친구 어머님은 아들 친구들이 아침부터 김치와 풋고추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는 게 안돼 보이셨는지 민물매운탕을 끓여주셨고, 우린 막걸리는 배가 부르고 화장실 가는 것이 귀찮다는 핑계로 쏘주로 갈아탔고 '술은 인류의 적, 마셔서 없애자'라는 건배사를 읊으며 죽기 살기로 퍼마셨다.

 

그날 내가 얼마만큼의 술을 마셨고 어떻게 집에 갔었는지 기억에 없다. 후에 친구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오후 4시쯤 술자리에서 일어나 엄니가 걱정하신다고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으로 갔다고 했으니, 아마도 오후 3시 이후에 필름이 끊기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갈증이 나서 눈을 떳을 땐 컴컴한 밤이었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아 누운 채 어둠에 익숙한 후 주위를 살펴보니 사랑방에 혼자 있었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켜니 온몸이 흙탕물에 젖었다. 꼬라지가 엉망진창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떤 연유로 내가 흙탕물 투성이가 된 것일까? 집엔 어떻게 왔을까?

 

엄니가 놓아두셨는지 머리맡에 있던 물을 들이킨 후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매운탕에 쏘주를 마시던 것까지 생각났다. 쏘주를 들이켜면서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겼던 것이다. 6월의 여름도 새벽 기온은 차가웠다. 우물가로 가서 몸에 찬물을 끼얹은 후 누워서 아무리 기억을 짜 봐도 머릿속은 깜깜이었다.

 

아침 밥상에서 마주 앉으신 아버님이 야단을 치셨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면 아무리 젊어도 몸이 골병들 텐데 뜨거운 여름에 어떻게 훈련을 받으려고 그러냐? 어저께 '종길'이 아니었으면 너는 논물에 빠져 죽었을 거시여. 술은 이길 수 있을 만큼만 마셔야지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시는 거여"

 

어머님이 얘기해주셨다. "종길이 아재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디 5시쯤 장터 쪽에서 걸어오던 니가 소를 매 놓는 풀밭에 벌러덩 눕더니 소똥 밭에서 이쪽저쪽으로 뒹굴더란다. 그래서 '저것이 군대 간다고 또 술을 마셨는가?'하고 내버려 두었는디, 30분쯤 누워있다 앉아서 토하더니 논으로 가서 세수를 하다 앞으로 꼬구라지고, 일어나더니 또 엎어지고, 논바닥에서 뒹굴면서 헤엄을 치더란다. 저러다가 무릎도 안 차는 논물에서 정신을 잃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달려가 끄집어내 데리고 왔다드라. 너는 종길이 아재 아니었으면 어저께로 죽은 목숨이었어"

 

음주(飮酒) 초기(初期)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중기(中期)에 이르면 술이 술을 먹는다. 술이 사람을 먹게 되는 말기(末期)가 되면 인사불성이 되어 블랙아웃(black out)이 되는 것이다. 술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활력소(活力素) 역할(役割)을 하지만, 때론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유혹을 갖게 하는 이중성(二重性)도 갖고 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뒀으면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효리 소주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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