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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이는 글

홍어삼합(洪魚三合) 유래(由來)

by 캘리 나그네 2020. 8. 9.

영산포 홍어거리에서 만난 칠레산 홍어, 생김새는 흑산도 홍어와 같지만 맛이 다르다고 한다. 원안에 있는 것은 홍어 간. 

 

 

홍어(洪魚)하면 흔히 영산포(榮山浦) 홍어거리를 떠올릴 것이다. 바닷가 항구(港口)도 아닌 영산포가 왜 홍어로 유명해졌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과거 영산포는 흑산도(黑山島)에서 잡힌 홍어뿐만 아니라 목포(木浦) 근해(近海)에서 조업한 배들이 고기를 싣고 영산강 뱃길을 이용해 올라와 정박(碇泊)하던 내륙(內陸)의 포구(浦口)였다.

 

영산포구(榮山浦口)에는 등대가 있다. 영산강 수위(水位)를 알 수 있는 숫자와 눈금이 큼지막하게 표시되어 있는 등대를 중심으로 크지 않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었고, 그것은 마치 어느 바닷가에 있는 작은 항구의 풍경을 보는 듯했다.

 

선창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어시장(魚市場)을 지나칠 땐 비린내가 심하게 풍겼다. 줄지어 있는 생선가게 사이로 드문드문 선술집이 있었고, 술집의 미닫이 출입문엔 흰색 글씨로 국밥, 막걸리, 안주 일체라고 쓰인 찢어진 빨간 천이 걸려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영산포는 나주군(羅州郡)에 속한 읍(邑)이었다. 그 당시 나주군 관내(管內)에는 남평(南平), 세지(細枝), 왕곡(旺谷), 반남(潘南), 공산(公山), 동강(洞江), 다시(多侍), 문평(文平), 노안(老安), 금천(金川), 산포(山浦), 다도(茶道), 봉황(鳳凰)등 13개 면(面)이 있었고, 각 면소재지(面所在地)에는 5일장(五日場)이 열렸다.

 

5일장 생선가게 상인들 대부분은 영산포 어시장(魚市場)에서 홍어를 비롯해 각종 생선을 도매로 구입해서 판매했는데, 상(喪)을 당했거나 혼사(婚事)가 있는 가정(家庭)도 영산포에서 홍어를 구입해 대사(大事)를 치르곤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상가(喪家)나 혼사(婚事)가 있는 가정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주된 음식은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였으며, 이 두가지 음식을 빼고 대사(大事)를 치루는 집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삶은 돼지고기와 홍어를 익은(숙성된) 배추김치와 같이 먹는 홍어삼합(洪魚三合)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고향 마을에서 주민들이 집안 대사(大事)를 치르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최초로 삼합의 맛을 알아내 주위에 알려주신 분은 나하고 성씨(姓氏)가 같은 일가(一家)로 항렬(行列)이 높아서 내게 할아버지가 되는 어르신이다.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로 기억하지만 높은 항렬 때문에 월곡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이분은(생존해 계신다면 106~7세로 추정) 젊었을 때부터 경조사(慶弔事)에 참석하면 늘 돼지고기와 홍어를 배추김치에 싸서 먹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80여 년 전부터 홍어와 돼지고기, 익은 김치가 연출하는 오묘한 삼합의 맛을 아셨던 분으로 다른 분들에게도 그렇게 먹으면 맛있다고 권유를 했었다는 것이다.

 

삶은 돼지고기와 홍어를 동시에 입에 넣고 씹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고향 어르신들도 엄청 맛있다는 월곡 할아버지 말씀에 홍어와 돼지고기를 익은 배추김치에 싸서 먹어본 후 삼합의 맛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고, 그 맛을 경험한 분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알려지게 된 것이 홍어삼합의 유래(由來)라고 확언(確言)할 수 있다.

 

홍탁삼합(洪濁三合)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예전 우리 고향에서는 홍탁(洪濁)이라고 했지 홍탁삼합이라고 하지 않았다. 삼합(三合)은 홍어, 삶은 돼지고기, 익은 배추김치를 말하는 것이고, 홍탁(洪濁)은 홍어와 탁주(막걸리)를 줄인 말로 홍어무침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는 것을 말했다.

 

고향에서 홍탁(洪濁)은 주로 모내기를 할 때 많이 먹었다. 싱싱했던 홍어도 저절로 숙성되는 모내기 철은 미나리가 많이 생산되었고, 부엌 아궁이 부뚜막 위 촛단지에서 발효시킨 식초를 넣은 양념에 홍어와 뜨거운 물에 데친 미나리를 섞어서 무쳐 낸 홍어무침은 모내기를 하면서 새참으로 막걸리와 같이 먹었고 어르신들은 이것을 홍탁이라고 했다.

 

홍어무침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막걸리 한잔 들이켜면 막걸리가 무척 달콤했다. 미나리 향과 홍어의 알싸한 맛이 입안에 남아 혀를 간지럽히곤 했는데, 미국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1967년부터 지속된 가뭄은 박정희 정부가 영산강 하구언 공사를 하게 만들었고, 강물이 바다로 가는 것을 막는 방조제가 완공된 후론 고깃배들이 올라오지 못해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내륙 하천에 있는, 군청이 소재한 나주읍 보다 더 번창하고 흥청거렸던 교통의 요지 영산포는 더 이상 포구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지독했던 가뭄으로 증조할아버지 묘소가 파헤쳐지는 일도 있었지만, 영암군과 나주군를 경계로 '남해당'이라고 불렀던 드넓은 영산강 하류 갯벌은 논으로 변했고, 숭어, 망둥어, 짱뚱어, 맛조개, 칠게, 농게, 반장게, 그리고 달팽이 일종인 미, 보리밥 등 맛있고 풍부했던 어족자원 또한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남해당'에서 갈대꽃을 뽑아와 빗자루를 만드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생태계도 파괴되고 풍경도 변해서 옛 정취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나마 홍어삼합으로 영산포가 주목받는 고장이 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낡고 좁은 영산교(榮山橋)를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건넜던 날을 떠올리며 고향생각에 젖어 보기도 한다.

 

 

홍어 한마리를 사면 가지런히 썰어서 용기에 담아준다. 
원안에 있는 것은 홍어탕을 만들 때 넣는 홍어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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