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된다." 1970년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에서 했던 발언으로, 명분과 실리에 따라 어제의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상징적인 말이다. 정치란 눈앞의 감정이 아닌, 내일의 권력을 설계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자 타이밍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민식 후보가 삭발을 했다. 고소건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진흙탕 싸움에서 감정의 골은 깊어졌고, 언어는 거칠어졌다. 그러나 정치는 생물과 같아서 이런 상황도 역설적으로 박민식이 '거물'로 도약할 수 있는 완벽한 무대가 될 수도 있다. 오늘의 고소가 내일의 화해로 치환(置換) 될 수 있어서다.
장동혁 국민의힘 지도부는 6.3 선거 이후 매서운 책임론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선거 패배의 먹구름이 드리운 상황에서 당권에만 매달리는 것은 침몰하는 배의 닻을 붙잡는 것과 다름없다. 반면, 무소속 한동훈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건전 보수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미래 권력의 독보적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박민식 후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영리한 생존 방식은 명분 있는 패배가 아니라, '미래를 살 수 있는 양보'다. 박 후보가 전격적인 후보 사퇴와 동시에 고소를 취하하고 한동훈 후보의 손을 잡고 유세차에 올라 북구갑 유권자들에게 한동훈 지지를 부탁한다면 정치권은 이것을 '배신'이 아닌 '대승적 결단'으로 기록할 것이다.
'보수의 분열로 민주당에게 어부지리를 줄 수 없다'는 명분은 삭발의 결기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다. 스스로 머리를 깎을 정도로 완주 의지가 강했던 만큼, 그 의지를 꺾고 내린 용퇴(勇退)는 보수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버려 보수 진영을 구한 살신성인의 영웅'이라는 강렬한 잔상(殘像)을 남겨서 두고두고 기억하게 할 것이다.
이런 결단이 남길 실리는 상상 이상이다. 무소속으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던 한동훈 후보가 당선되어 대권 가도로 직행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승리의 날개를 달아준 박민식 후보에게 정치적 부채를 지게 된다. 한 후보가 중앙 정치와 대선 판으로 가게 되면, 그가 일궈놓은 부산 북구갑이라는 텃밭은 자연스레 박민식의 몫이 될 것이다.
한동훈의 '정치적 후계자' 혹은 '지역구 대리인'이라는 바통 터치가 가능해질 것이며, 2년 뒤 총선, 혹은 한 후보의 대선 출마로 인한 조기 보궐선거에서 박 후보는 한동훈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무혈입성할 기회를 갖게 된다. 결국 지금의 고소와 극한의 갈등은 정치적 타협을 극적으로 돋보이게 만들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책사(策士)는 소탐대실(小貪大失) 하지 않는다. 당 지도부와 함께 공멸하느냐, 한동훈의 배에 올라타 미래를 보장받느냐. '정치는 생물'이라는 격언을 믿는 자만이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 될 자격을 갖듯, 박민식의 대승적 사퇴는 단순한 물러남이 아닌 차기 총선과 대권 정국을 강하게 뒤흔들 가장 매력적인 복선(伏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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