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가주( 北加州)의 12월도 겨울이랍시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우기(雨期)에 접어드는 이곳의 겨울이야 예년과 별로 달라질 게 없겠지만, 내 몸뚱이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피하(皮下)의 지방층이 얇아지는지 뼛속을 스미는 듯한 추위에 '내의를 입을까?' 하고 고민을 한다.
겨울, 누구라도 살아오는 동안 겨울에 얽힌 추억 몇 가지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요즘처럼 추위를 느끼는 겨울이면 40여 년 전 군대(軍隊) 생활을 할 때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태기산(泰岐山) 정상의 매서웠던 추위를 떠올리곤 한다.
태기산(泰岐山),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과 청일면, 이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평창군 봉평면을 아우르는 높이 1,261m의 산이다.(일명 '덕고산'이라 부르기도 함)
금수저를 물고 나온 놈들에게 군대는 먼 나라의 동화 속 이야기가 되겠지만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라도 빠짐없이 가야 하는 군대, 나는 군(軍) 생활의 절반이 넘는 기간을 태기산 중계소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몸서리쳐지는 태기산의 겨울, 매서운 추위와 함께 몰아치는 눈보라는 내무반 건물을 덮어버릴 듯이 쌓인다. 치우고 치워도 쌓이는 눈과 혹독한 추위가 지겨워서 제대를 하면 강원도 쪽으론 오줌도 싸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했지만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엔 내 젊음의 일부를 묻어놔서인지 함께 고생했던 전우들이 그립고 가보고 싶은 산이다.
1.261m 태기산 정상에 위치한 통신중계소, 겨울은 일찍 찾아오고 봄은 더디게 오는 탓에 겨울이 무척 길다. 그래도 사계절은 뚜렷해서 봄이면 밑에서 부터 올라오는 초록을 볼 수 있고, 가을이면 빠르게 내려가는 단풍을 볼 수 있어 시인이 아니어도 시(詩)가 읊어지고, 소설가가 아니어도 한 편의 글을 쓰고 싶은 그런 감성을 자아내는 곳이다.
운해(雲海)가 가득한 날은 포근한 솜처럼 깔린 구름 위로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이 산(山)에서 저 산봉우리로 마구 건너뛰어도 될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쫄병 시절, 얼음물에 맨손으로 식기를 닦고, 눈을 치우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겨울을 지내다 보면 초록의 봄이 올라오고, 올라오는 봄을 뒤따라 후임병(쫄병)이 올라온다. 봄이 되면 세찬 눈보라에 느슨해진 파리채 모양의 VHF(Very High Frequency) 통신 안테나를 점검하고, 폭설에 무너진 참호를 정비하면서 짬짬이 철책 주변에 있는 약초를 캐서 보관해둔다.
모아놓은 약초는 화전민들에게 건네주고 강원도 명물 경월소주와 교환하고, 약간의 쏘주를 남긴 됫병에 몇 뿌리의 더덕을 쑤셔넣어 땅에 묻고 표시를 해둔다. 그렇게 봄을 지내다 보면 여름은 온 듯 모르게 다녀가고 태기산엔 다시 가을이 온다.
먹거리가 많았던 태기산의 가을, 근무외 시간이나 최소 근무자만 남겨놓는 주말이면 민가에서 얻어온 비료포대를 들고 산 골짜기를 훑고 다니며 머루, 다래를 비롯해 가을이 주는 열매를 따며 시간을 보낸다.
가을의 끝 무렵엔 몇 개의 가마니에 담긴 염장 미역과 멸치조림, 고추장, 된장, 난로에 지필 경유, 발전기용 휘발유를 보급받아 저장고에 보관하며 월동준비를 한다. 월동 준비가 끝날 즈음엔 소금물에 절인 배추에 고춧가루 양념을 대충 발라 김장을 하고 김장을 마치고 나면 태기산엔 세찬 눈보라와 함께 매서운 겨울이 시작된다.
우린 긴 겨울 동안 임산부가 아니어도 젖이 나올 만큼 하루 세끼 반찬으로 미역국, 미역무침, 미역볶음을 먹었으며, 그때 미역에 질려버린 나는 지금도 생일에 끓여주는 미역국 외엔 미역으로 만든 요리를 거의 먹지 않는다.
그 당시 우리가 질리도록 미역을 먹었던 이유는, 상사 계급장을 단 중대 똥싸계가 사병들의 부식비를 삥땅 치기 위해 값이 저렴한 염장미역을 가마니로 올려 보냈기 때문이다. (똥싸계: 중대 인사계를 비하한 은어)
짬밥 연륜이 쌓여 고참이 되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통신 벙커에서 식당, 내무반을 오가며 "조뺑이는 쳐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라는 우리들의 은어를 뱉으며 벽에 걸린 달력의 숫자를 볼펜으로 지워가면서 제대할 날짜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하루 두번씩 점검하는 통신 회로를 최상의 상태로 개통시키지 못하면 근무 조장이란 이유로 원주에 있는 본부로 복귀해서 똥싸계에게 쪼인트를 까이고 뭐 빠지게 봉체조를 하고 올라온다.
그때 나는 태기산 산신령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오랫동안 중계소에서 근무했지만 새로 부임한 대대장의 목소리를 몰라뵌 불충으로 근무태도 불량이란 죄명을 쓴 채 본부에 복귀해서 양쪽 어깨가 자줏빛으로 멍이들 만큼 봉체조를 한 적이 있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후임병과 같이 최소 근무자 2명이 되어 통신벙커를 지키던 토요일 오후.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들어본 적 없는 신임 대대장이 주말 오후에 군사령부 통신 단말을 순찰하는지 모르고 장비에서 울리는 신호에 수화기를 들었는데, 들려오는 첫마디는 "대대장인데 소대장 있나?"였다.
우린 다른 파견지에 있는 동기나 중대원들과 통화를 할 때면 '나 단장인데' '대대장인데' '중대장인데' 등의 농담을 하곤 했는데, 이 날도 대대장을 사칭하는 농담인 줄 알고 "대대장 목소리가 왜 이렇게 히쭈구리 하냐?" 하고 대답을 하니 잠깐 침묵하던 수화기에서 "자네 누군가?"라는 저음의 답변이 나온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뒷통수에서 시작해 척추를 거쳐 꼬리뼈까지 싸늘한 느낌을 준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제대 말년 고참. 나는 예감이 안좋아 수화기를 내려놓고 벙커 밖으로 나갔지만 계속해서 울리는 신호에 응답한 후임병이 내 이름과 계급을 말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본부로 복귀해서 양쪽 어깨에 멍이 들도록, 조금 저급하게 표현을 한다면 존나게 봉체조를 했던 것이다.
나중에 사령부 단말에 있던 동기를 통해 들은 이야기는 지금도 배꼽을 쥐게 한다. 대대장이 곁에 있던 중대장에게 "중대장! 내 목소리가 히쭈구리 한가?" 하고 묻더란다.ㅋ 그렇게 나는 전설이 되어 제대하는 날까지 중대원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아~~ 꿈에도 잊지못할 태기산 화장실. 통신 벙커 아래엔 내무반이 있고 그 옆엔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두 칸짜리 푸세식 화장실이 있다. 봄, 여름, 가을엔 오랜 시간 쪼그리고 있어도 괜찮지만 눈보라가 치는 겨울엔 그야말로 고역이다. 특히, 변비가 있는 사병에겐...
분뇨를 퍼내는 뒤쪽의 뻥뚫린 공간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쪼그라든 생식기를 얼려버릴 듯 매서웠고, 우린 생식기에 동상이 걸릴까 봐 반피(半皮) 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꼬옥 감싸 안은 채 일을 본다. (반피(半皮) 장갑: 손바닥은 가죽이지만 손등은 천으로 된 군용 장갑)
혹독한 추위에 배설물은 얼어붙어 위로 솟아오르고, 시간이 지날 수록 높아지는 똥탑은 항문을 찌를 듯이 솟아올라 의자에 걸터앉은 듯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을 봐야 했고, 소대장은 불편해서 안 되겠다며 솟아오른 똥탑을 부수라고 지시한다.
가위 바위 보를 하여 뽑힌 2인 1조의 작업자는 안테나를 설치할 때 사용하는 1m 길이의 쇠말뚝과 해머를 들고 뒤쪽 공간으로 들어가서 탑을 깨뜨려 부수는데, 장갑을 끼고 안면마스크을 착용 해도 튕기는 파편은 목덜미나 옷사이로 들어가고, 그럴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털어내는 작업자 때문에 지켜보는 우린 배꼽을 쥐고 뒹군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얼어붙은 배설물은 냄새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태기산의 군생활도 이제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머지않은 시기에 내가 경험했던 태기산은 기억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신(神)이 있어 그 시절의 젊음을 준다고 해도 다시 돌아가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지금처럼 추위를 느끼는 겨울이면 태기산의 매서운 추위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고생했던 전우들이 그립고 우릴 괴롭히던 똥싸계가 생각나서 몇 자 끄적거리는 것뿐이다.
이번 겨울에도 찾아갈 예정인 눈덮힌 Pyramid Pe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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