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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이는 글

세월이 만든 우정

by 캘리 나그네 2025. 10. 10.

 

젊은 날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 시절의 아내와 나는 인생(人生)을 배우는 학생이었다. 우리의 웃음 속엔 꿈이 있었고, 눈빛에는 아직 세상을 다 살아보지 못한 기대와 설렘이 있다. 때론, 다투고 화해하면서 삶과 사랑이 무엇인지 한 걸음씩 배워 나갔다. 그렇게 긴 세월을 함께한 우리는 이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아침마다 내어주는 따끈한 커피 한 잔, 식탁에 올려주는 소박한 반찬, 작은 배려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우리만 느끼는 사랑의 언어이자 함께한 세월이 만든 진한 우정(友情)이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닌 사람이 풍기는 향기를 느낄 수 있고, 그 사람의 쓴맛과 단맛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타는듯했다면 지금은 은근한 화롯불 같은 우정이다. 말을 건네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전해지는 애틋한 정(情)은 긴 세월을 함께한 흔적(痕跡)이다. 와인이 오래도록 숙성되면 더욱 깊은 맛을 내듯, 지난 시절의 고난(苦難)을 견디고 참아온 믿음, 의리, 사랑은 더욱 진하고 단단해져 찐 우정이 된 것이다. 

 

무정한 세월은 머리카락에 흰 서리를 내려앉혔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을 그렸다. 마주 볼 때마다 낯설게 느껴지던 세월의 상흔(傷痕)도 이젠 따스하고 정겹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제 예전처럼 빠르게 뛰지 못한다. 세상에 내어놓을만한 꿈도 없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조급함 대신 이해와 배려가 담겨있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해가 지기 때문이듯, 늙는 것은 사라짐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건강한 늙음도 하늘이 주는 축복이기에 찐 우정을 주제로 신(神)이 허락하는 날까지 자그마한 연극의 막(幕)을 올릴 것이다. 늦게 피는 꽃이 더 아름답듯 세월이 할퀴고 간 자리엔 주름살과 흰머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내와 함께 올랐던 마운틴 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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