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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온 글

숲에서 배운다

by 캘리 나그네 2021. 12. 8.

The Forest of Nisene Marks State Park(Aptos Creek Rd, Aptos, CA 95003)

 

산을 떠나 6, 7년 시정(市井)의 절간에서 사는 동안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았다. 얻은 것이라면 이 어지러운 시대의 공기를 함께 호흡하면서 세상 물정을 몸소 보고 느낀 점이었고, 잃은 것은 내 안에 지녔던 청정한 빛이 조금씩 바래져갔던 점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자기 내면에 지닌 빛이 바래져간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수행자가 빛의 기능을 잃는다면 자신뿐 아니라 그 둘레까지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게 마련이니까.

 

시정에서 뭣보다 아쉬웠던 것은 내가 기댈 만한 숲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그 그늘 아래서 사유하고 행동하던 울창한 숲도 날로 비대해만 가는 수도권에 침식을 당하고 말았었다. 밖에서 밀려오는 소음이 너무 두터워 내 안에서 움터 나오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빛이 바래져갔던 것이다.

 

산승(山僧)의 본거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숲이 있는 적정처(寂靜處). 지난해 가을 숲속에 산거를 마련하여 훌쩍 귀환했던 것이다. 마치 한 마리 산짐승이 들에 나가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지친 몸으로 옛 보금자리를 찾아 돌아온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뜻을 같이 하던 동료들 곁을 떠나온 미안함의 무게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지만, 건강과 빛을 잃어가던 내 처지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숲에는 질서와 휴식이, 그리고 고요와 화평이 있었다. 숲은 모든것을 받아들인다. 안개와 구름, 달빛과 햇살을 받아들이고, 새와 짐승들에게는 깃들일 보금자리를 베풀어 준다. 그리고 숲은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을 할퀴는 폭풍우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것이 숲이 지니고 있는 덕인 모양이다.

 

숲으로 돌아오자 우선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흙을 만지고 나무들을 대하니 시정에서 묻은 때가 씻기어갔다. 맑은 바람을 쏘이고 시원한 샘물을 마실 때 시들었던 내 속의 뜰이 조금씩 소생하기 시작했다. 침묵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숲에 새로운 물감이 번지고 새들의 목청에 물기가 배자 나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인 양 온몸에 푸른 수액(樹液)이 돌았다.

 

외부의 소음에 매몰되어 들리지 않던 저 '바닥의 소리'들이 조금씩 들려오는 것이었다. 흙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면서 손수 가꾸어 먹으니, 자연의 질서에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흙과 나무와 물로 이루어진 자연에는 거짓이 없다. 뿌리고 가꾼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 질서 앞에서는 억지나 속임수 같은 게 용납이 될 수 없고, 또한 그 세계안에서는 아무것도 쇄신(刷新)할 게 없다. 본래 갖추어진 그대로이다. 그저 진실로써 대하면 진실의 응답이 있을 뿐.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길들일 줄 알면 되는 것이다.

 

지난봄 숲에 새 물감이 풀리고 있을 무렵 자연의 조화(造化)를 지켜보면서 나는 여러가지로 배운 바가 많았다.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 빛깔을 잎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그 어떤 나무도 자기를 닮으라고 보채거나 강요하진 않았다. 저마다 자기 빛깔을 마음껏 발휘함으로써 숲은 찬란한 조화(調和)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나무들이 한결같은 빛깔을 하고 있다면 숲은 얼마나 답답하고 단조로울 것인가. 그것은 얼이 빠져버린 고사림(枯死林)이지 생명이 있는 숲은 아닐 것이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허공에 가지를 펼치면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무들이기 때문에 자기답게 살려고 자신의 빛깔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나름의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찬란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저 획일화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우리로서는 그 장엄한 조화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자연은 무엇인가. 단순한 흙과 나무와 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정복의 대상은 아니다. 몇 시간만 비를 내려도, 몇 치만 눈이 쌓여도 벌벌 기는 우리 주제에 정복이란 가당이나 한 말인가. 그 질서와 관용 앞에서 인간은 분수와 역량의 한계를 알고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인간의 배경은 피곤한 도시문명이 아니라 '그대로 놓여진' 자연일 것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람답게 사는 법을 거듭거듭 배워야 할 것이다. 인류사상 위대한 종교와 사상이 교실 아닌 숲에서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자연은 인간에게 영원한 모성(母性)인 것이다.

 

그런데, 요 근래 우리 둘레의 자연은 무슨무슨 구실로 말할 수 없이 파괴되어가고 있다. 한번 파괴된 자연은 다시 회복할 길이 없다는 데에 안타까움이 더하다. 주말 같은 때 산사(山寺)의 주변을 살펴보라. 거기서 우리는 오늘 이 땅의 뒤뜰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나라 국민의 자질은 수출고나 소득증대의 숫자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들이 자연을 얼마만큼 아끼고 사랑하느냐에, 자질의 척도를 두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다. <1976.8>

 

법정(法頂)스님 수상집(隨想集)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The Forest of Nisene Marks State Park(Aptos Creek Rd, Aptos, CA 95003)

 

법정(法頂,1932.10.8~2010.3.11) 한국의 승려이자 수필 작가이다. 대표적인 수필집으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등이 있다. 속명은 박재철이다. 1932년 10월 8일 전라남도 해남(海南)에서 태어났다.

 

1956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3년을 수료한 뒤, 같은 해 통영 미래사(彌來寺)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曉峰)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같은 해 7월 사미계(沙彌戒)를 받은 뒤, 1959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승려 자운(慈雲)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어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승려 명봉(明峰)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고, 《불교신문》 편집국장·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살았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끄는 한편, 1996년에는 서울 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었다. 2003년 12월 회주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폐암이 발병하여 3~4년간 투병생활을 하였으며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생전에 수필 창작에도 힘써 수십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는데, 담담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정갈하고 맑은 글쓰기로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 작가로도 문명(文名)이 높다.

 

대표적인 수필집으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텅빈 충만》 《스승을 찾아서》 《서 있는 사람들》 《인도기행》 등이 있다. 그 밖에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숫(수)타니파타》 《불타 석가모니》 《진리의 말씀(법구경)》 《인연이야기》 《신역 화엄경》 등의 역서를 출간하였다.

 

출처: 법정(法頂)두피디아 (doopedia.co.kr)

 

 

The Forest of Nisene Marks State Park(Aptos Creek Rd, Aptos, CA 9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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