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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이는 글

무등산(無等山)

by 캘리 나그네 2016. 12. 24.

사진/강성문

 

나는 아버지의 유별난 교육열(敎育熱) 덕분에 두 곳의 국민학교(國民學校)를 다녔다. 고향(故鄕)에 있는 학교에 입학(入學)해서 3학년을 마쳤으니 이것이 내 생애(生涯) 처음으로 문턱을 밟았던 학교이고, 4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광주(光州)에 있는 서석국민학교로 전학(轉學)을 해서 졸업(卒業)했으니 입학(入學)과 졸업(卒業)이 다른 두 군데의 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부터 시작한 서울 생활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생활과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이민(移民)을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앞으로 내가 몇 살까지 살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수명(壽命)을 80으로 가정했을 때, 인생의 1/4 가량은 서울에서 보낸 것이고 3년이란 짧은 기간을 생활했던 광주는 촌놈이 단계를 거치며 도시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넓은 들과 낮은 민둥산, 따뜻한 인정(人情)과 순박함이 있던 고향을 떠나 번화하고 바빠 보이는 도시 생활은 어린 마음에도 갇혀있는 듯 한 느낌이 들어서 일요일이면 친구들과 칡을 캐러 조선대학교 뒷산을 찾았고, 산길에 익숙해지면서 무등산을 찾아 야생 열매를 따먹고, 날씨가 더운 일요일엔 봄, 가을 소풍 때 학생들로 붐비던 증심사(證心寺)를 끼고 흐르는 계곡에서 멱을 감고 가재를 잡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당시 무등산 밑자락엔 '무등보육원(無等保育院)'이라는 고아원(孤兒院)이 있었고(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무등보육원에서 가까운 곳에는 '배고픈 다리'로 불리던 작은 다리가 있었다. '배고픈 다리'는 교량(橋梁)의 중간 부분이 푹 꺼져있어 흡사 사람이 배고플 때의 형상(形象)과 비슷하다 하여 '배고픈 다리'라고 불렀고, 다리 중간이 볼록했던 '배부른 다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등보육원에서 생활하던 원생(院生) 중에는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 중에 잊히지 않는 친구가 있다. 5학년때 같은 반이었고 1학기때 짝꿍이었던 친구의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빡빡 깎은 머리와 자그마한 체구,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옷차림과 하얗던 얼굴은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있다. (지금 생각하니 창백했던 얼굴을 하얗게 착각한 것도 같다.)

 

눈이 슬퍼 보였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던 친구였는데, 운동장에서도 급우(級友)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길을 걸을 때는 늘 땅을 보면서 걷던 친구였다. 그땐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타원형으로 구운 두툼한 옥수수 빵을 지급하곤 했는데 군것질할게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빵을 받는 아이들을 부러워했고 꼬드겨서 도시락과 바꿔 먹기도 했다.

 

눈이 슬퍼 보였던 친구는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탓에 옥수수 빵을 1순위로 지급받곤 했는데, 어떤 날은 빵을 반만 먹고 나머지 절반은 잘린 부분이 부서지지 않도록 엄지손가락으로 꼭꼭 눌러 주머니에 넣어 가져가곤 했다. 나는 친구가 방과 후 보육원에 가서 간식으로 먹기 위해 가져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먹으려는 게 아니고 보육원 중학생 형들이 트집을 잡아 때리기 때문에 절반의 빵을 갖다 주면 빵을 건네지 않는 아이들에 비해 덜 맞거나 단체기합에서 빼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풍족하지 못한 식사를 하는 친구가 절반의 빵을 주머니에 넣고 먼 길을 걸어 무등산 밑자락 보육원으로 가는 동안 주머니 속에 있는 빵을 만져보며 얼마나 먹고 싶어 했을까? '배고픈 다리'를 건널 때쯤이면 절반의 빵을 먹은 친구는 공복(空腹) 상태가 되었을 텐데, 빵이 풍기는 달콤한 유혹을 어찌 견뎠을까? 배고픔 보다 보육원 형들이 더 무서웠던 것일까? 절반의 빵만 먹은 친구에게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먹지 않던 친구의 힘없던 표정이 한 해가 저무는 12월이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작은 형님, 작은 누나와 함께 방한칸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으니 내 도시락 반찬도 달랑 김치일 수밖에... 그것도 주말에 먼지를 휘날리며 비포장 도로(非鋪裝道路)를 달리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서 가져오거나 아버지께서 가져다주곤 하셨는데, 힘들게 조달해 먹는 형편상 다양한 반찬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반찬은 둘째치고 보리밥도 배불리 못 먹던 가정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는데...

 

※ 이런 얘기를 하면 유신교주 박정희를 추종(追從)하는 수구꼴통들이 이렇게 배불리 먹고사는 게 누구 덕인 줄 아느냐고 게거품을 물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근면(勤勉)하고 성실(誠實)하셨던 우리 부모님이 피땀 흘려서 가난을 해결한 것이지 딸보다 어린 여자를 옆에 끼고 유흥(遊興)을 일삼았던 박정희가 우리 가족의 끼니와 가난을 해결해 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김치뿐인 도시락이지만 밥을 눌러서 담아주는 작은 누나 덕분에 친구와 나는 절반의 옥수수빵을 반으로 나눠 1/4씩 먹고 내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5학년 1학기를 함께 보냈고, 여름방학이 끝난 2학기엔 짝꿍이 바뀌고, 6학년이 되면서 서로의 반(班)이 달라 화장실이나 운동장에서 얼굴을 마주치곤 했지만 졸업(卒業)한 이후 지금까지 얼굴은커녕 생사(生死)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그 당시 서석국민학교는 학생수가 무지 많았다. 엄청나게 많았던 학생 수를 분산(分散)시키기 위해 1,2, 3학년은 서석동 본교(本校)에서 오전 오후로 나눠 2부제 수업을 했고, 4학년은 지산동에 있는 분교(分校)에서 2부제 수업을 했으며, 5, 6학년 때는 중학교(中學校) 입시(入試) 준비를 하느라 오후 늦은 시간까지 본교에서 수업을 했다.

 

4학년 때 우리 형제(兄弟)는 전남여고(全南女高)에서 가까운 동명동 2구 동사무소 맞은편에 방을 얻어 자취를 했다. 자취방에서 한참을 걸어 지산동 분교로 등교를 하다 보면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교도소(矯導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동명동 교도소'라고 불렀고 그 형무소(刑務所) 옆에는 무와 배추를 심어놓은 드넓은 채소밭이 있었다.

 

푸른 수의(囚衣)를 입은 죄수(罪囚)들은 인분(人糞)이 가득 담긴 통을 리어카(손수레)에 싣고 와 바가지로 퍼서 채소밭에 뿌렸고 띄엄띄엄 떨어져서 일하고 있던 죄수(罪囚)들 중에는 감시(監視)하는 간수(看守)의 눈을 피해 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학교로 가는 우리에게 돈을 주며 담배 한 갑 사서 집에 갈 때 던져놓으라고 채소밭 모퉁이 한 곳을 지정해 주던 사람도 있었다.

 

우린 그렇게 무등산의 품에서 학교를 다니며 무등산이 만든 계곡에서 더운 여름날을 보냈고, 칡을 캐고 야생열매를 따먹으며, '무등산'이 들어간 교가(校歌)를 부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다녔던 서석국민학교의 교가에는 어김없이 '무등산'이란 세 글자가 들어있지만, 아마도 광주에 있는 모든 학교의 교가에 무등산(無等山)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등산(無等山), 1.187미터 높이로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산군(光山郡)과 화순군(和順郡) 사이에 있는 산(山)이다. 산은 웅장(雄壯)하고 높지만 정상(頂上) 부근의 입석대(立石帶)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고 흙으로 이루어진 토산(土山)이어서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그런 산이다.

 

누군가는 등급(等級)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높은 산이어서 무등산( 無等山)이라 부른다 하고, 어떤 사람은 이성계가 이 씨 왕조(李氏王朝)를 세우기 전 전국의 높은 명산(名山)을 찾아 기도를 올릴 때마다 왕(王)이 되는 현몽(現夢)을 해주는데 오직 '무등산'에서만 꿈을 꾸지 못해 이에 실망한 이성계가 "이 산은 명산이 아니다"라고 하여, 등수가 없는 산, 무등산(無等山)이란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남도인(南道人)들에게 무등산은 명산(名山)보다는 영산(靈山)의 개념(槪念)이 더 강할 것이다. 반역(反逆)을 꿈꾸는 이성계의 기도를 묵살하고 대꾸를 안 해줬으니 이처럼 영험(靈驗)한 산이 어디에 있을 것이며, 노령산맥(蘆嶺山脈) 줄기와 평야지대(平野地帶)가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광주를 비롯한 인근의 중소도시를 품고 아우르는 어머니와도 같은 산이니 어찌 영산(靈山)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어느 해인가 서석국민학교와 무등산(無等山)을 찾아가 보려 작정을 하고 한국(韓國)을 방문했건만, 가고 싶었던 학교와 무등산은 근처(近處)에도 못 가보고 친구들 손에 이끌려 이 집 저 집 찾아간 술집에서 술잔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결국엔 술에 푸~욱 절은 몸이 되어 미국행(美國行) 비행기에 오른 적도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무등산의 추억(追憶)은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뒷산에서 칡을 캐고, 열매를 따먹고, 증심사(證心寺) 계곡에서 멱감으며 놀았던 3년에 불과하지만, 나는 지금도 작은 다리를 건널 때면 '배고픈 다리'를 생각하고, 노르스름하고 두툼하게 구워진 빵을 보면 슬픈 눈을 가졌던 친구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Gilroy 채소 재배지(栽培地)를 지나칠 땐 동명동 교도소 옆 넓은 채소밭과 담배가 고팠던 죄수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광주에 살고 있는 강성문 친구가 눈 내린 무등산을 오르며 폰으로 찍은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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