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중 조홍(盤中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 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세 글로 설워하나이다
-박인로(朴仁老)-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1561~1642]의 대표작인 「조홍시가(早紅柿歌)」는 1600년(선조 33)이나 1601년에 지은 시조로 추정되는데, 박인로가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장현광을 찾아갔을 때 홍시[붉은 감]를 대접하고 그를 소재로 시조를 지어보라 하여 지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박인로가 이덕형을 찾았을 때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은 홍시를 보고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다하지 못한 효성이 불현듯 생각나서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덕형이 이미 지어진 「조홍시가(早紅柿歌)」를 보고 박인로에게 단가(短歌) 세 수를 짓게 하였고, 그후 『노계선생문집』을 간행하면서 4수를 묶어 「조홍시가」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혼란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 삼국 시대 오군인(吳郡人)으로 여섯 살 난 육적(陸積)이 스승인 애술(哀術)을 찾았을 때, 대접으로 귤 몇 알을 내놓았다. 선생이 잠시 없는 틈을 타서 어머님을 봉양하고픈 생각이 불현듯 들어 귤을 품에 품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 앞에 하직인사를 하려 하자 그 귤이 쏟아져 나왔다. 스승 애술이 왜 먹지 않고 품에 품었냐고 물으니,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내용으로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애국애족하는 우국지심(憂國之心)은, 임진왜란을 당하매 의병에 참가하여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아갔으니 「태평사(太平詞)」와 「선상탄(船上歎)」을 통하여 잘 표출되어 있다.
이러한 선생을 가리켜 여헌 장현광은 늙음을 모르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하며, 학문에 힘쓰는 ‘동방의 인호(人豪)’라고 칭송하였고, 안찰사로 내려온 이명(李溟)은 ’독행지립지사(獨行特立之士)‘로 계(啓)를 올려 인조 임금이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후손들을 돌보라고 명하기도 했다.
글 출처: 디지털영천문화대전 (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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