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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온 글

목마와 숙녀(詩/박인환. 낭송/박인희)

by 캘리 나그네 2020. 11. 2.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詩/박인환

낭송/박인희

 

 

 

1955년 『박인환 시 선집』에 실린 박인환의 대표작.

 

전체적으로는 전쟁에 연원을 둔 허무의식과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 있다. 시의 주요 메시지는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라는 부분이다. 시의 정조 자체는 떠남과 소멸로 이루어지고, ‘떠나다/ 부서지다/ 보이지 않다/ 작별하다/ 목메어 울다’라는 행위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가치의 상실과 그로 인한 비애로 현실을 인식하는 시인에게 목마와 숙녀의 세계는 비논리의 신화적 세계이다. 목마와 숙녀는 시인이 찾고자 했던 별, 사랑, 문학, 인생 등 삶의 다양한 의미 범주를 포괄하는 은유이다.

 

지상의 공간을 떠난 목마와 숙녀는 지상에 남은 사람들에게 희미한 의식으로 잔해를 남길 뿐이고, 가치를 상실한 시인의 비애는 원죄의 운명과 미끈미끈한 실존을 지닌 뱀으로 표상된다.

 

천상의 공간에서 방울 소리를 울리는 목마와 지상의 공간에서 무거운 실존을 자궁으로 기어다니는 뱀은 허무주의와 센티멘털리즘에 빠진 시인의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대립항이다. 박인환의 허무주의는 전쟁을 통해,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집요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허무주의는 깊은 성찰을 통해 작품으로 형상화되지 못하고 죽음에의 평범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의 모더니즘적 가치는 상식선을 넘지 못하고 어휘의 빈곤, 이미지의 분산, 경박한 겉멋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나 그녀의 작품 「등대로」는 그의 서구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데 시의 전체적 맥락에 연결되지 못하는 낯설음을 준다. 또한 음이나 리듬의 감미로움이 읽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긴 하지만 유창하게 반복하는 경향, 연설조의 문장, 영탄조의 표현, 1인칭어의 빈번한 사용, 독백체의 어투 등은 서정시의 기본 전제인 미적 긴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목마와 숙녀 (한국현대문학대사전,2004.2. 25.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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