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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온 글

윤이상 동백(冬柏)

by 캘리 나그네 2017. 7. 10.




윤이상은 거인이다.
시대가 쓰러진 곳에서 윤이상의 음계는 더 높았다.

광주가 피흘리면서 울부짖을 때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Exemplum in Memoriam Gwangju>(1981)가 나왔고,
민주 세상을 향해 조국이 몸부림칠 때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MEIN LAND, MEIN VOLK!>(1987)가 터져나왔다.

윤이상은 이 곡이 남한 땅에서 초연되기를 바랐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대신에 그는 비바람 몰아치는 삼팔선 철조망을 악보 삼아 작곡을 했다.
지금도 하고 있다.
지리산 계곡 깊은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윤이상은 거목이다.
그의 인간미가 뿜어내는 너른 그늘은 여름 나그네들을 쉬게 했고
따뜻한 품은 겨울 손님들을 거느렸다.

윤이상은 음악에는 까다로웠지만 그의 거처는 쫓기는 자들에게 백림(伯林)하숙집이었다.
이 여름, 가던 길 나무 그늘 아래 쉬거든 눈을 감고 한번만 그를 초혼해보라.
윤이상은 만인을 음악으로 초대했지만 조국은 한번도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도 그는 이 땅의 어느 그늘 아래서도, 어느 품에서도 쉴 곳이 없다.
그대 가슴에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윤이상이 잠시 깃들게 하면 어떨까.
거기가 윤이상의 조국이다.


윤이상은 거음(巨音)이다.
그의 음악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뮌헨올림픽(1972) 문화축전 때 그는 오페라 <심청>을 무대에 올렸다.

윤이상이 평생 귀환하고자 했던 용궁은, 단언컨대 오직 귀향이었다.
그 또한 심청처럼 일본 배를 타고 고향 바다 근처를 떠돈 적이 있었다.
그 배는 닻을 내리지 못했고 그는 큰 물 앞에 선 청이처럼 울어야 했다.

인당수에 뛰어들어서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면 윤이상은 기꺼이 마다하지 않았을 게다.
그의 음악은 통영바다와 인당수와 백림의 바다를 잇는 ‘심청’이다.

오늘 죽은 그의 머리 맡에 향리에서 옮겨간 동백 한 그루를 드리워 심었다.

1백 살 되는 해에, 아흐, 동백 한 그루를 백림 땅에 삼가 모시나니,
선생이시여,
봄이 아니라도 남녘 동백향 흠향하소서. 


▲ 작곡가 윤이상 (1917~1995) <사진제공=뉴시스>



윤이상은 전향서를 쓰지 않는 대신 통일 독일에서 죽었다.

작곡가에게 전향서란 없다.

조국을 사랑하는 모든 작곡가와 시인은 굳이 사상범이다.
사랑과 사상은 하나다. 사랑은 반드시 경계를 넘고, 그래야 사랑이다.
세상이 그 경계를 ‘사상’ 따위로 기소할 따름이다.

윤이상은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고향의 정서적인 기억을 온몸에 지닌 채 평생 작품을 써 왔습니다.
고향에 가게 되면 통영의 흙에 입을 대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내가 귀국하면 나는 그리워하던 고국의 흙을 만지게 된다.
그 때 흙에 입을 가까이 대고서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윤이상은 지리산녘에서 태어나 통영 바닷가에서 장성했다.
그에게 산맥은 곧 파도였고 큰 물결은 곧 산이었다.
산에서 파도소리를 듣고 바다에서 산울음을 돋우었던 그의 삶이 우연이겠는가.

같은 해(1917)에 태어난 식민지 장교 출신 박정희는 항일운동가 출신 작곡가 윤이상 등을
국내로 몰래 끌고와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공작했다.

박정희의 딸 또한 정권을 쥐고 있는 동안 그의 음악을 버겁게 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윤이상 평화재단’이 들어 있었고
재단사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이 두드러지지 못한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윤이상의 무덤은 베를린 외곽 가토우 지역묘지 특별묘역 Landschaftsfriedhof Gatow에 있다.
묘지를 소개하는 누리집 대문 아랫부분에 윤이상의 무덤이 나온다. 

소개글에서 ‘명예 무덤’이라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는 데 독일인들보다 한국인들이 더 소홀한 것만은 틀림없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귀국하지 못한 채 이국 땅에 묻힌 작곡가 윤이상의 백림 묘지 앞에
한국 대통령 내외 이름으로 동백나무를 심은 날은 2017년 7월5일이다. 


▲ <사진제공 =서울시향/뉴시스>



칸타타 KANTATA
<나의땅, 나의 민족이여! MEIN LAND, MEIN VOLK!>(1987) -윤이상

나의 이 교성곡(칸타타)을 1987년 2월과 3월 2개월 동안에 완성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민족을 위한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안겨질 곡을 쓰고 싶었다.

이 곡은 나의 양심에서 참을 수 없어 터져나온 곡이다.
이것으로써 ‘광주여 영원히!’와 함께 나는 작곡가로서 우리 민족에게 바치는
나의 절절한 호소와 충정을 표시한 것이다.

이 교성곡의 바탕이 된 시의 작가들은 대다수가 전문시인이라기보다는
순수한 민족주의자들이다.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 공산주의자라고 할 사람은 없다.
‘노동’ ‘인민’ ‘평등’과 같은 용어들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높은 민족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내가 이 곡에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제목을 붙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땅은 우리 민족의 주인이다.
우리의 땅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고 이 땅에 사는 민족은 갈라질 수 없다.
우리의 역사가 가르쳐준 쓰라린 교훈은 우리 민족 앞에 주어진 지대한 과업이고 목표이며,
그 때문에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고 호소형으로 표현하였다.

이 곡의 초연은 남한에서 하는 게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서 1987년 10월 4일 평양에서 행해진 것이다.

남한의 민족 시인들의 절통한 부르짖음이 분단된 내 나라 이북에 메아리쳐,
좌우의 정치적 현실을 초월하여, 민족의 쓰라린 심정이 38선을 뛰어 넘어,
똑같이 호흡하고 눈물로 민족의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지 않은가.

이 곡을 통해 작곡가도, 시인들도, 또 연주자들도 어떠한 영예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찢어진 심장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꿋꿋이 통일의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 앞에 영예가 돌아간다면 나는 작곡가로서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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